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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에 큰 획을 그리고 있는 컴퍼니제도를 되짚어 보려면, 소니의 CEO 시대를 꼭 되짚어야 한다. 소니는 일본 대표 IT 기업이라 그런지 각 경영자의 시대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연대기적 평가를 한다. 


예를 들면 소니의 ~시대로 비유 되는 것인데, 소니는 크게 5대 경영진의 시대로 비유되곤 한다. 창업주 시대인 1~2대까지는 세계 IT 지배의 시대로 소니의 찬란한 역사를 대변하는 시대로 가장 찬란한 역사를 자랑한다.


이후 3~4대의 전문 경영인 시대는, 소니 파괴의 시대로 점철 될 수 있는 문제의 시대로 소니가 혁신의 동력을 잃고 사내 정치, 관료화로 망가지기 시작한 시대로 볼 수 있다. 


1세대 이부카 시대는 기술 개발과 창조적 기업문화 확장에 올인한 시대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나 트리니트론 브라운관 같은 세계 최초의 제품들을 계속해서 개발해내 현재의 소니의 기틀을 다진 시대이다.


2세대는 소니의 글로벌화를 이끈 모리타 시대로 워크맨, TV, 영상 분야에서 본격적인 독자 브랜드를 구축하고, 세계 IT 시장을 본격적으로 지배한 시대이다. 이미 최고의 기술력과 일본의 장인정신이란 가치가 세계 소비자에게 뿌리내리고 있었고 이런 가치에 소니 브랜드를 입혀 고부가 산업으로 급성장을 이끌었다. 


이 시대의 상징은 바로 워크맨으로 대변되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최고의 희트작을 만든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문제의 3세대 오가 시대가 다가온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이 세대도 문제점만 있었던것은 아니었다. 오가 시대는 아날로그 방식의 레코드 중심의 음향 시장이 주류였던 시대 였지만, 당시 소니의 기술진은 CD 중심의 디지털 음향 시장으로 음향 시장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며, 세계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다. 


이는 마치 애플이 CD 플레이어 중심의 음악 시장을 MP3 중심의 음악 시장으로 전환한 것이나, 피처폰 중심의 모바일 시장을 스마트폰 중심의 모바일 시장으로 패러다임을 이끌고 간 사례와 비견 될 수 있는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찬란한 성과에도 오가 노리오 회장 시대를 추락의 서장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가 잘못 결정한 투자로 소니가 큰 부채를 앉게 됬기 때문이다. 


그가 재임하던 소니 시절인 1998년 일본 환율 기준으로 5000억엔 이라는 프리미엄을 얹은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콜럼비아 영화사를 인수한다. 콜럼비아 영화사가 이름 있는 영화사기는 했지만, 당시 추락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고, 과한 투자라는 인식에도 컨텐츠 확보가 필수라는 오가 회장의 독단으로 이들을 인수한 것이다. 


콜롬비아 영화사는 인수 후 매년 수백억엔 단위의 적자를 냈고, 1조5000억 엔이라는 부채로 소니의 성장에 발목을 잡는 계기를 만들었다. 


오가 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94년 이루어진 미국의 브라운관 공장건설이다. 당시 시장이 점차 PDP 같은 평면패널로 전환되는 상황에서 삼성은 PDP, LCD 디스플레이 개발과 투자에 온 신경을 쏟은 것에 비해, 소니는 잘 팔리기는 했지만, 덩치 크고 무거운 브라운관 TV가 점차 시장에서 외면 받을 것을 예측했어야 했지만,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는 대규모 시설 투자를 감행한 것이다.


이런 묻지마 투자는 결국 실패로 돌아왔고, 1991년 8000억엔 가깝던 잉여금이 만 3년만인 1994년에는 2700억 엔까지 추락하며 위기가 됬다. 2700억엔이면 아직 많은 비용을 가진 것이 아니냐고 생각 할지 모르지만, 잉여금 대비 은행권에서 차입한 비용을 제외하면 1조5000억 엔에 적자 상태를 기록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비용을 그리 큰 잉여금으로 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1995년쯤해서 4세대인 이데이 시대가 열리는데, 오가 회장은 이들에게 소니 사상 전무후무한 적자 상태의 기업 환경을 물려주는 위기가 찾아왔다. 


그의 업적은 소니식 관료화의 상징 컴퍼니제도를 만들고 체계화 한 장본인이라는 점과, 무리한 투자로 소니에 부담이 되는 부채를 남겼다는 점이다. 



미래의 핵심이 될 수 있었던 컨텐츠 강자


소니의 추락 시점을 보면 오가 노리오 회장 이후 시절에 본격화 된다. 오가 노리오 회장은 본격적으로 소니의 성공에 도취되 세계를 놀라게하는 인수 합병을 성사시켰다. 


소니 지휘봉을 잡았던 오가 노리오 회장은 평소 관심이 많았던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를 시작한다. 콜롬비아 영화사 유니버셜 스튜디오, CBS레코드와 BMG..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거액의 자금을 사용했다.


이로 인해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됐지만, ‘콘텐츠와 하드웨어의 결합’이란 측면에선 최소 20년 이상 앞선 선택을 해다고 역평가를 내려 볼 수도 있다. 현재 소니가 어렵기 때문에 오가 노리오 회장의 평가에 부정적인 내용이 대다수지만, 만약 애플과 같은 건전하고 발전적인 생태계를 자신들이 가진 다양한 자산과 결부시켜 성공을 도모했다면 아마 오가 노리오 회장의 “신의 한 수”를 가진 위대한 경영의 신이라며 호들갑을 떨어 댔을지도 모른다. 


경영은 결과로 평가 받을 수 밖에 없고, 만약이란 전제는 사실 성립될 수 없다. 하지만 현재 모바일 시장을 움직이는 힘이 OS, 하드웨어, 컨텐츠의 3가지 핵심 요인으로 시장이 움직인다는 점에서 소니의 문제는 경영과 함께 올바른 비전 정립이 기업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 수백번 되뇌이고 분석해 보아야 할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소니의 문화를 망친 이데이 시대?


이데이 회장 시대는 소니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시대이다. 이전까지의 소니는 오로지 하드웨어 중심과 현장 중심의 기술 경영이 주도하는 시대였다. 


그런데, 이데이 회장은 이런 소니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소프트웨어로 급격한 비즈니스 전환을 시도한다. 그래서, 리제네레이션이나 디지털 드림 키즈 같은 캐치 프레이즈를 만들어 소프트웨어와 네트워크 중심으로 회사의 체제를 전환하기를 꿈꿨다. 


애플도 이쯤해서 스티브잡스가 복귀하며 체제를 컴퓨터 생산 중심에서 음향과 컨텐츠 비즈니스를추가해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을 시작했던 점을 생각하면 방향성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당시 이데이 회장의 인터뷰등을 찾아보면 종합적으론 이런 개념을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니는 인터넷을 통해 콘텐츠 허브를 만들어 소니의 모든 디바이스에 콘텐츠를 유통 시키겠다는 전략을 선보였다. 


이를 위해 1995년 인터넷 접속회사인 소네트를 설립했고, 스카이 퍼펙트 TV를 통해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에도 진출했다. 또, 애플이 먼저인 것으로 알려진 온라인 음악 상점 서비스를 애플보다 먼저 론칭했다. 프레스플레이(Pressplay)라는 서비스로 음악 다운로드 받아 다양한 소니 디바이스에서 사용 할 수 있게 유도하려 했다. 


게임 분야에서도 에버퀘스트(EverQuest)라는 서비스를 통해 게임 다운로드를 지원하는 계획도 발표한다. 

 

이런 전략적 접근 때문에 1997년 바이오(VAIO)라는 브랜드를 론칭하며 PC 사업에 뛰어든 것은 것은 산업은 인터넷과 PC로 융합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AV 제품과 PC를 연결시켜주는 아이링크(i.Link)라는 소프트웨어도 이때 개발한 것이다. 


취임후 3년 만에 5200억엔 흑자를 만드는 성과는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데이 회장 시대의 최대 문제점은 그가 미국식 경영 기법의 선봉자 였다는 점이다. 컴퍼니제도의 도입은 전임 오가 회장이 시도했지만, 체계를 구축한 것은 이데이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 역시 스피드 경영을 강조하며 컴퍼니 제도를 더욱 중용한다. 이를 통해 모든 사업간 경쟁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며 실적 중심의 회사로 소니를 탈바꿈 시킨다.


현재의 소니식 관료화의 상징인 컴퍼니 제도의 정점에 이데이 회장이 자리하고 있고, 이것이 바로 소니 오너쉽의 한계로 이어져 현재에 이르렀다고 분석 할 수 있다. 


그런 그였지만, 그가 소니에서 이룩한 업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인 OLED의 개발, 플레이스테이션으로 게임시장 장악, 바이오 브랜드 론칭으로 PC 시장 진출, 캠코더/디지털 카메라 시장 진출등 성과도 많이 냈던 경영자였지만, 정치중심, 경영과 마케팅 중심의 사고, 실적 중심의 철학은 그를 소니 역사의 최대 문제적 CEO로 인식 시키게 했다.



이데이 회장 몰락을 일으킨 전조들?


이데이 회장은 외부의 강력한 외압에도 CEO에서 물러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2003년 소니 쇼크로 대변되는 주가 폭락을 기록하고, 실적이 급락하자, 컴퍼니제도를 악용해 실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료 2003년 10월 유례 없는 2만명 정리해고를 감행했다. 


기술 중심의 소니의 자랑스런 가치는 플레이스테이션 3 발매에 최악으로 치닫는다. 2005년 5월로 예고 된 발매 시기를 연장하는가 하면, 플레이스테이션의 핵심인 자체 제작 GPU 오류로 공급선을 자체 개발에서 NVIDIA로 긴급 전환하는가 하면, 자체제작 CPU인 셀(CELL)도, 성능 문제를 야기하며, 기술력이 실종 된 소니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시장은 이런 사건들을 계기로 소니의 제조 능력 이상으로 해석하며 주가 하락의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결정타로 여겨지는 리튬 이온 배터리 폭발사건은 그의 퇴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분석이다. 


소니는 미국의 PC 업체인 Dell, 애플, 레노보.. 등에 배터리를 납품하고 있었는데, 배터리가 폭발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결국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대의 컴퓨터 리콜 사태로 발전했고, 이데이 퇴임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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