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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으로 불리운 IT의 남자 '스티브 잡스', 그가 남긴 IT 26년의 발자취와 기록들

애플의 고향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맥월드는 항상 그를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의 키노트 스피치는 청중을 매료 시키는 감동의 향연이었고, 그는 IT Geek들의 신인것 처럼 굳이 말로 이해시키지 않더라도 이해가 되는 마법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iPhone 5에 대한 기대감이 어제 하루를 애플 이슈로 들 끓게 많들었던 그의 마법도 이젠 하나의 뱃고동 처럼 추억속에 사라지는 꿈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삶과 인생에 관여 할 수는 있어도 생을 스스로가 지배하지는 못했던 것처럼 그도 다른 인간들 처럼 우리의 곁을 떠나 갔습니다.

삶의 고독과 처절한 인생과 도전/혁신의 가르침을 전한 영원한 멘토이자 스승이었고, 독보적인 전설로 기록 된 그의 인생 기록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전합니다.



죽음 조차 선택을 위한 도구로 생각했던 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는 이미 지난 8년간 병마와 치열한 싸움을 이어왔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2003년 10월 췌장암(췌장 신경내분비종양) 진단을 받았고 이듬해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습니다.

이후에는 언론 등을 통해 건강을 되찾은 듯한 모습을 보여줬으나 2008년 다시 건강 이상설이 불거졌고 2009년 1월 잡스는 병가를 내고 간이식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습니다. 얼마 후 다시 회사로 돌아온 그는 올해 1월 다시 병가를 내 건강 악화설과 함께 지난 8월 24일 CEO직에서 물러나게됩니다.

너무도 느닺 없는 그의 죽음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받아 들여야 한다는 숙명으로 다가오지만 그가 보여준 인내와 처절한 삶의 역사는 IT 인들에게 삶과 인생에 대한 투철한 가르침을 일깨우는 정신과도 같았기에 안타까움을 금할길이 없습니다 .

2005년 그가 복귀한 이후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그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죽음은 삶이란 운명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다", "죽음 조차 선택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아마도 이런 그의 철학적인 표현들은 그가 심취해 있던 불교에 영향속에 나온 것이겠지만, 그의 삶에 있어서 어떤 가치관과 방향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를 대변하는 의미 있는 표현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불우한 환경, 끝 없는 호기심,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도전정신, 남과 같은 것을 싫어했던 독보적인 그의 철학은 바로 이런 가치간과 인생사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방향으로 녹여져 보여진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건 바로 "꿈 꾸는자의 삶"이었던 것이고, IT 인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정신으로 길이 남을 것입니다.


[감동적인 스탠퍼드대 연설 펼쳐보기]


스티브 잡스가 남긴 처절한 언더그라운드 인생의 역사
스티브 잡스는 1955년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지 1주일만에 폴·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됐습니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구글을 참조하세요) 초등학교 시절 자주 학교를 빼먹는 문제아였지만 아마추어 전자공학 키트를 통해 그는 역사적인 IT인의 첫 발걸음을 내디디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 위치한 쿠퍼티노 중학교와 홈스테드 고등학교를 다녔고, 고등학생 때는 훗날 애플의 공동 설립자인 스티브 위즈니악과 팔로알토의 휴렛 패커드사에서 잠시 일한 것은 전설을 위한 서사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리드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다 흥미를 갖지 못해 1학기를 마치고 중퇴하였고 76년 스티브 워즈니악 꼬셔서 함께 애플을 창업합니다.



워즈니악에게 아타리(Atari)로부터 받은 게임 관련 프로젝트(Breakout 이라는 게임)를 소개해주게 되고 워즈니악은 불과 4일만에 게임을 프로그램해냈는데 여기에서 그 유명한 스티브 잡스만의 해적정신이 발휘됩니다.

잡스는 아타리로부터 댓가로 700 달러를 받았다며 워즈니악에게는 350달러만 주고 말았는데 실제로는 아타리로부터 5,000 달러를 받았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친구를 속였지만 그의 유려한 화술과 언변의 힘이 어떠했는지 증명하는 대목입니다.

잡스는 부모님이 비싼 학비를 내는 데 대해 부담스러워 리드 대학교를 중퇴했다고 밝혔지만 그는 최소 그 학교에서 18개월 동안 학교에 청강하며 애플의 트랜드를 주도 할 기초 지식을 배웁니다.

특히 타이포그래피는 글자를 다루는 시각 디자인의 한 분야인데 책의 주제를 아름다우면서도 개성있는 글씨로 요약하여 표현하는 이 분야에 관심이 생겨 청강하게 되고 이후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면서 수려한 글자체를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이 많이 받게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실리콘 밸리의 신화 창조자'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애플 1, 애플2, 리사, 매킨토시 등을 개발하면서 입니다. 물론 리사의 실패와 매킨토시의 저조한 판매로 당시 CEO인 존 스컬리에 의해 숙청 당해 그가 설립한 애플에서 쫒겨나는 신세가됩니다.

애플을 떠난 뒤 넥스트사를 세웠고, 이후 86년에 조지 루카스 감독의 컴퓨터 그래픽 회사인 픽사를 인수합니다. 픽사에 10년간 6000만 달러를 투자해 할리우드 최고의 3D 애니메이션 회사로 키워내 다시 디즈니에 되팔에 7.6%의 디즈니 주식을 보유한 대주주로 올라섭니다.

97년 애플 복귀 후 넥스트사를 애플에 병합시키면서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모바일 OS인 iOS를 기초로한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신화를 만들어 내며 지금의 신화를 이룩합니다.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스티브 잡스식 나쁜 남자의 역사
스티브 잡스는 젊은 시절 사귀던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지만 “내 딸이 아니다”라며 부인하고 양육비도 주지 않았을 정도로 악질적인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부인로렌 파월을 만나면서 가치관이 변화했고 가족에 대한 뜨거움이 생기면서 가정적인 아버지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웃들에 따르면 그는 아이들을 위한 기괴한 핼러윈 복장도 마다 않는 아저씨이며, 그의 자식들의 수업에 참관하는가 하면 아들과 수영장 파티에도 나타나는 가정적 남자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이전까지 스티브 잡스는 나쁜 남자로 기억 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젊었을때 히피 문화에 깊이 매료되어 장발에다 맨발로 다니기도 했고 선불교를 믿고 채식만 해서 샤워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몸에선 악취가 났을정도로 괴팍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엄청난 자존심과 다혈질적 성격 때문에 주변인과 불화가 끊이지 않았으며,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애들처럼 울고,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변기안에 발을 집어넣고 물을 내리는 괴상한 취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뿐이 아니라 영감을 이끌어낸다며 마약을 공공연히 즐기고, 자신의 애인이었던 크리스 앤 사이에 딸이 하나 생겼는데 (이 아이가 리사죠?) 자신은 아버지가 되기 싫다며 낙태하라고 주장하다가 뜻대로 되질 않자, 양육비까지 주지 않으며 그들과의 인연을 끊을려고 노력했을 정도 입니다.

그의 이런 잔인함은 도를 넘어설 정도였는데 리사의 친자 확인 테스트가 90% 이상의 확률로 일치했음에도 그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친자 확인 소송이 진행되고 나서야 리사를 자신의 딸로 받아 들였을 정도라고 하네요.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애플에서 쫒겨나게 된 계기를 만든 제품이 '리사'였는데, 자신의 딸로 받아 들인뒤 그가 그의 딸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제품명에 자신의 딸이름을 넣을 정도로 말이죠.

아무튼 그의 괴팍하고 못 된 성격을 개조한 것은 그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안내자였던 와이프 로렌 파월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독재자 스티브 잡스를 변화시킨 철의 여인 로렌파웰
잡스는 1989년 가을 스탠퍼드 대학교 MBA 학생들의 강의 초청 제안을 받게 됩니다. 넥스트와 자신이 생각하는 기술의 미래에 관한 것에 대해 강연을 진행하기로 한 것인데.. 사실 당시만 해도 이런 강연을 진행 될 정도로 스티브 잡스의 상황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이 강연을 진행하는데 이 강연에서 그의 영원한 반쪽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스탠퍼드대 강연장은 잡스를 보기 위해 몰려든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들중 1학년 과정에 있는 로렌 파월이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이 강연을 기획한 학생들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강연은 시작되고 잡스가 연단에 섰지만 그답지 않게 강연중 허둥대기 시작 했다고 합니다. 말 흐름이 끊기는가 하면, 얼굴이 중간 중간 빨개지기도 했다죠? 학생들은 그래도 그에게 집중했지만 스티브 잡스는 그 강연에 집중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바로 로렌 때문이었죠. 그녀 때문에 집중력을 잃고 허둥대기 시작한 것인데 강연중에도 잡스의 시선은 로렌에 머물러 있었고 그녀의 매력적인 모습에 빠져 첫눈에 반하고 맙니다.

모델처럼 늘씬했고 금발의 전형적인 백인 여성의 매력해 흠뻑 취해 그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강연이 끝났지만 그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로렌 때문이었죠. 결국 다른 약속을 포기하고 바로 로렌에게 달려가 저녁 식사를 하게되었고 이후 사랑에 빠졌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둘은 우연찮게도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둘 다 채식주의자였고 생활방식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고 합니다.

얼마 뒤 로렌은 임신을 했지만 잡스는 그녀의 임신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겁이 났던 거죠. 결국 거절했는데 그녀는 충격을 받아 스티브 잡스를 떠나게됩니다.

그녀가 떠나자 스티브 잡스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에 정신적 충격과 함께 고통의 시간을 보내던중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로렌을 맞아들여 결혼에 골인합니다. 그가 결혼을 망설인 것은 23세때 방탕한 삶과 사랑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이라고 하는데..

누군가를 책임지고 지킨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던게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는 새 삶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든단한 인생 최고의 지원군을 얻게되죠. 아래 이미지처럼...



IT 업계를 변화 시킨 스티브 잡스의 역사적 선물들..
많은 이들이 잘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그가 손댄 제품은 비록 그의 머리에서 탄생해 최초란 이름을 얻은 제품들은 많지 않았지만, 남들이 갖지 못한 시각으로 남들과 다른 뛰어난 제품을 재 창조시키는 마법을 통해 세계 IT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된다는 점입니다.

즉 창조자이면서 모방자 였던 Artist라고 봐야 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첫 시작은 애플1(1976년)이었습니다. 애플이 내놓은 첫 컴퓨터 제품으로 생산 대수는 많지 않았지만 애플의 시작과 성공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이 디자인하고 잡스가 자금을 모으고 마케팅한 첫 제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번째 선물은 애플2 (1977년)로 성공적인 개인용 PC로 당시 제품의 혁신적인 디자인과 모티브 기술은 IT 역사에 유명한 일화로 기록됩니다. 애플1에 이어 스티브위즈니악이 설계를 담당했으며, 수 차례 업그레이드를 거쳐 1993년 11월까지 생산됐습니다.

세번째 선물은 리사 (1983년) 였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 퇴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지만 IT 역사에서 그래픽 인터페이스 시대로 진입시킨 역사적 제품으로 잡스가 제록스사 연구소를 방문하고 나서 그들이 만든 GUI 개념에 영감을 받아 개발한 첫 번째 상업용 컴퓨터로 마우스에 의해 아이콘, 윈도, 커서 등이 동작하는 그래픽 사용자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오늘날 컴퓨터 인터페이스의 기반이 된 제품입니다. 하지만 너무 높은 가격에 처참한 실패를 맞보게 되었죠.



네번째 선물은 매킨토시 (1984년)로 리사와 비슷한 시기에 나왔고 비슷한 성능과 개념을 제공했지만 제품 타겟은 레이저 프린팅등에 특화 시켜 출판과 그래픽 분야 진출을 위한 제품입니다. 큰 성공은 얻지 못했지만 애플이 마니아층을 형성하게 된 결정적인 제품으로 기록되고 애플이 위기에서 그래도 잘 버틸 수 있는 효자 제품이었습니다.

다섯번째 선물은 넥스트 컴퓨터 (1989년)입니다. 애플에서 물러난 잡스는 애플에서 이루지 못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길 원했고 워크스테이션 컴퓨터 분야에서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 냅니다. 세계 최초의 웹 브라우저와 현재 맥 OSX와 iOS의 토대가 되는 넥스트 OS를 만들게 되는 것이죠.

여섯번째 선물은 아이맥 (1998년)으로 잡스가 애플 복귀후 애플 추락을 반전시킨 결정적인 제품입니다. 아마 이 제품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애플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지 모를일입니다.

일곱번째 아이팟 (2001년)과 아이튠즈 (2003년) 스티브 잡스는 더이상 컴퓨터 개념으론 시장 포화속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판단하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넵스터로 인식되던 디지털 음원 시장입니다.



비밀리에 특수 프로젝트를 만든 끝에 하드 드라이버를 기반으로 한 혁신적이고 매력적인 디자인의 아이팟을 만들어 냈고 이 성공을 발판으로 새로운 컨텐츠 유통 모델을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아이튠즈입니다.

이런 개념은 현재의 앱스토어로 이어지고 아이폰, 아이패드란 여덟번째 선물을 안겨준 계기가 됩니다.


애플 신화를 일군 사과 모양 로고의 비밀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이 공동 창업한 애플의 로고가 왜? 사명이 되었는지 몰랐던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스티브 잡스가 죽어서 명확한 근거는 아니지만 스티브 잡스 사망후 공동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이 과거 잡스와 애플 로고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 비밀이 풀렸다고 합니다.

워즈니악은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애플 창업 당시 공동체 형식의 사과 과수원에서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이때부터 애플이란 이름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실제 로고를 디자인한 롭 야노프 역시 과거 이와 유사한 발언을 했다고 하는데요. 잡스가 사과 과수원에서 일을 했고 애플(사과)란 이름을 무척 좋아했었다고 이야기 한적이 있다고 합니다.

잡스는 당시 사과가 영양가가 풍부하고 포장하기 쉬우며, 강도도 높은 완벽체에 가까운 과일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완벽체에 가까운 회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회사명을 애플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다만, 애플이란 사명을 만든 스티브 잡스가 죽었기에 정설로 받아들여야 겠지만, 과거 여러 루머가 있었기에 애플 로고에 대한 진실은 어쩌면 영원히 밝히기 쉽지 않은 과제로 남았다고 보는게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티브잡스 성공에 영향 미친 배신코드
여러 인물과 기업들이 있을 텐데요. 이런 배신코드가 스티브잡스를 지배하게 된 것은 그의 특출난 능력들 때문입니다.

그는 매킨토시 개발후 완벽한 GUI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당시 일반적인 회사들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전문 폰트를 개발합니다.

그 폰트는 이제 애플의 상징이 되었고 애플의 모든 제품의 기초가 되었죠? 그리고 넥스트사 창업후에도 넥스트사 로고를 위해 유명 디자이너 4명과 인터뷰 했고, 당시 예일 대학의 폴랜드 (Paul Rand) 교수를 찾기까지 했다는 군요.

폴랜드 교수는 Graphic Art의 중진으로 IBM과 웨스팅하우스의 로고를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럴정도를 열정과 창의성을 갖춘 인물이라 많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배반당해야 했습니다.

그 첫번째가 바로 빌 게이츠입니다. MS 시작의 기초가 된 Windows 역시 애플의 매킨토시를 보고 따라하게 되었고, 당시만해도 빌 게이츠는 스티브를 우상으로 떠받들 정도 였습니다.

두번째가 Adobe 입니다. 포스트 스크립을 지원하고 이를 통한 출판계를 장악하며 그래픽 솔루션의 일인자가 된 계기가 바로 애플과 스티브 잡스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을 때렸고 나중에 아이폰 발매후 플래시를 배제함으로 복수합니다.

세번째가 존 스컬리로 애플 초창기 CEO가 되고 싶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이사회가 승인하지 않아 자신의 대리인으로 내세운 스컬리에 의해 배신당해 애플을 떠나죠.

네번째가 구글과 래리페이지 일 것입니다. 구글이 모바일에 진출하기 전까지만해도 서로의 경영자가 각각의 회사에 이사회에 참여하며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지만 구글이 모바일 시장에 진출하며 이 동맹은 깨지게 됩니다.

이처럼 IT 업계는 합종연횡이 빈번했지만 문제는 서로의 영역을 언젠가 침범하게되며 물고 물리는 사움이 전개되며 발전을 이룩해 왔고 그 중심에 스티브 잡스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떠난 스티브 잡스, 위대했지만 이제는 보내줘야 할때~~
그는 모방과 복제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했습니다.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하고 쉬우면서도 매력적인 것을 선호했고, 기술과 사람에 대한 이해를 기반하라는 인문학적 사관은 아직도 우리의 귀를 울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누구보다 No라는 단어를 외쳤고, 누구보다 직원들을 못살게 굴고 괴팍하게 대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애플은 많은 인재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 혼자서 모든 것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그는 방향과 미래를 제시했고 이를 리딩만 했지만, 그것이 아이폰, 아이패드, 앱스토어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흐름과 같이 했기에 위대한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



누구보다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왔고,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인 만큼 이제 그가 편히 쉴 수 있게 그를 놔 줘야 하는 시점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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