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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는 일본의 대기업 중 가장 먼저 컴퍼니 제도를 도입한다. 오가 노리오(大賀典雄) 사장 시대인 1994년 4월부터 실시했는데, 사업부를 마치 하나의 독립회사처럼 취급해 환경의 변화에 신속하게 적응하도록 함으로써 비즈니스에 대한 민첩성을 높이려는 목적이 이유였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는 마치 LG의 글로벌 마케팅 컴퍼니 전략의 패착을 불러온 사례와 비슷한 결과를 낳게 된다. 

  

LG의 글로벌 마케팅 컴퍼니 비전처럼 소니의 컴퍼니 제도도 처음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 제도의 도입으로 당시 업계에선 「실력주의를 표방하는 소니에 걸맞은 개혁」이라는 찬사를 받았을 정도니 제도 자체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후 미츠비시(三菱)화학, 히타치(日立) 등에서 이 제도를 도입하면서 컴퍼니 제도는 당시 일본 IT 기업의 경영의 트랜드가 되었다. 

  





소니의 DNA를 회손시킨 컴퍼니제도


이 제도가 장점이 있는데 반해서 단점도 존재했다. 개인적으론 이것이 소니를 관료주의와 혁신의 DNA를 잃어버리게 만든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 각 사업부를 독립 회사처럼 운영되게 함으로서 효율성을 높였지만, 문제는 독립 회사로서 독립 채산성을 추구해야 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사업간 시너지나 유기적 연결이 아니라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각자 매출과 수익을 따로계산하게 하는 일종이 경쟁 체제를 제시한 것인데, 이렇다 보니 외부의 기업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소니 내부의 독립 회사끼리 경쟁하는 체제가 되면서, 오히려 도전이나 혁신을 저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들면, 자신들이 연구개발비를 지급한 기술에 대해서는 다른 부서에서 사용할 수 없게 한다든지, 사용하고 싶으면 같은 소니 내에서도 서로 비용을 지불해야만 사용이 가능하게 하는 병폐가 생긴 것이다.


이 컴퍼니 제도가 소니의 혁신적 연구 활동이 제약하게 된 이유도, 경쟁 체제가 되면서 과거에 회사에서 책임지고 부담하던 연구개발비가 각 연구 조직별로 연구비를 타내야 하는 컴퍼니를 설득해 비용을 받아내야하는 구조로 변화 시킨 것이다. 


사외가 아닌 사내에서 조차 이제는 혁신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선 각 컴퍼니를 설득하며 연구 개발 스폰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문제는 당장 돈이 되는 기술은 그나마 그런 스폰을 받기 수월한 편이었지만, 기초연구 장기 실험 과제와 같은 프로젝트는 수년간 수익으로 실현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실적면에서 불리함을 갖게 됐고, 각 컴퍼니도 당장에 실적과 연관되는 이런 여구를 지원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소니가 삼성에 반도체, LCD, 모바일에서 급격하게 밀리기 시작한 것은 결국 기술과 혁신의 상징이었던 소니가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경영과 마케팅 컴퍼니로 조직이 변질됐기 때문이다. 


컴퍼니 제도의 핵심인 비용의 투명성, 의사 결정의 스피드, 조직의 유연성은 이런 소니 상황에서기대 할 수 있는 덕목이 아니었던 것이다.




외국인 임원 시대의 또 다른 빛과 그림자


컴퍼니 제도가 소니의 혁신 DNA를 변질시킨 악성 종양의 역할을 담당했다면, 외국인 최초로 일본 기업 CEO에 오른 스트링거와 사외 이사 제도는 마치 노키아의 경영 위원회 같은 소니의 무기력증을 불러낸 독재 정권과 같았다. 


사외이사 제도는 본 제도의 취지를 호도 할 정도로 지나치게 많은 비중을 갖고 있어 경영 견제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다. 총 15명의 이사진 가운데 13명이 사외이사 였고, 이들 사외 이사들이 전문성이 없는 인력으로 구성 되 소니 사업의 전반을 이해 할 수 없었고, 경영을 견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들도 거수기 역할만 하는 집단으로 전락하며 스트링거의 독선을 견제하지 못했다. 


스트링거 체제하에서 4년 연속 적자와 TV 사업 부분의 문제로 결국 낙마했지만, 그가 성공적으로 소니에 안착한 시점만을 살펴 본다면, 여러 면에서 남용 부회장의 LG 전자 체제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5년 취임 이후 지속적으로 엔지니어들을 해고해 기술 경쟁력을 갉아먹었고, 경영 효율화란 미명 아래 연구소 규모와 개발 비용은 줄여 나갔다. 이런 정책들은 유능한 인재들의 소니 탈출을 도모했는데, LG의 최근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남용 부회장처럼 외국인 임원 부대를 대거 기용하면서 내부 소통의 문제와 일본 임원과 외국인 임원간의 경쟁 구도를 만들었고, 기술 개발을 등한시하고, 기존 제품을 이용한 수익 개선에만 몰두해 시장 패러다임을 완전히 놓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는데, 이런 점들이 LG의 남용 체제와 비견되고, 결국 실패의 역사도 비슷한 전철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실패하는 기업들에는 여러 문제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좋은 경영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트링거가 좋은 평을 받았던 부분이 유연한 사고를 기반으로 폐쇄적인 소니의 기업 문화를 개방형으로 돌리고 사업부 협력과 마케팅을 강화 했다는 점에선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역시 문제가 촉발되던 시점에는 실적 하락과 함께, 스트링거 회장이 대려온 외국인 임원들의 불화가 큰 짐이 됬다는 분석이다. 


친정 체제 구축까지는 좋았지만, 심각한 상황에서도 외국인 임원은 스트링거의 비호아래 책임을회피할 수 있었고, 이는 또 다른 차별을 낳으며, 소니를 위험으로 빠뜨리게 된다. 



해킹 사태로 볼 수 있었던 외국 임원 문제


2011년 5월에 있었던 해킹 사고를 봐도 소니의 외국인 임원 문제가 얼마나 심각 했는지 알 수 있다. 모름지기 조직의 수장이라고 한다면 해킹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전면에 나서서 책임을 지고 문제를 해결 해야 했지만, 소니 네트워크 엔터테인먼트 인터내셔널(SNEI) 회장인 팀 샤프는 회견 장소에도 나타나지도 않았다. 


정보시스템 담당인 조지 베이리는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인물 이었지만, 스트링거의 비호 아래 유야무야 되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그가 맡은 일을 수행하며, 스티링거 문제를 전면에 드러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스트링거 회장에 7년 재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TV 사업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실적이나 다양한 영역에서 양호한 경영 실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2008년 3월 결산을 보면, 순이익은 3,200억 엔으로, 규모로 보면 전년 대비 3배나 늘었다. 또 그룹 전체의 매출은 8조 8,700억 엔으로 전년대비 6.9%가 증가하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한다. 


DVD 표준에서 블루레이를 규격 싸움에서 이끌어 낸 것도 그의 수완과 경영 능력을 입증하는 사례가 되면서 장기 집권이 가능했다. 문제도 많았지만, 경영적인 능력으로만 본다면 이런 문제를 덮어줘도 될 정도 능력은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 그의 재임기간 7연도 롤러코스터의 연속이었다. 재임 3년간은 실적 고공행진을 이어갔고, 이후 4년은 적자 행진을 이어갔다. 4년 적자 행진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세계 금융 위기와 리먼 사태등이 실적 하락의 주요 원인 이었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가 재임한 7년간 소니의 시가총액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퇴임 직전 TV 사업부는 존폐를 거론 할 정도로 심각한 실적 문제를 노출했다. 삼성과 S-LCD 합작이 기술 협력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실지로는 소니가 차세대 LCD 평판 기술을 확보하지 못해, 생산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고 할 정도다. 


결국 올해 스트링거는 권자에서 내려오며 소니의 암흑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됬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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