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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사무용 어플리케이션 시장의 강력한 도전자를 만나다

제가 연재중인"생애 최고의 타짜, 빌게이츠의 세상 지배법"이 매우 많이 늦어졌습니다. 이 시리즈는 워낙 방대한 자료와 서치가 필요해 사실 연재하는데 여간 부담 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또, 최근 일이 많다보니 2~3시간 투자 여유가 없어서 연재를 못하고 있다가 간만에 큰 맘먹고 다시 시작합니다.

혹 기다린 분들이 있다면 죄송하고, 앞으로도 종종 이런 상황이 발생 할 수 있으니 넓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오늘 다룰 10부에서는 본격적으로 MS가 사무용 어플리케이션 시장을 장악해 가는 과정을 소개 하려고 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첫 주도권을 잡았던 애플과 연관 된 두 기업의 이야기를 먼저하고 이들의 역학 관계를 풀어나가면서 MS를 집중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이전글 "9부 - Microsoft 성공의 또 다른 열쇠 MS Office의 역사"에서 MS가 애플을 통해서 오피스 시장에 진입 할 수 있었다고 말씀 드렸고 애플이 결국 이 시장에 MS를 끌어들이게 된 계기는 바로 애플2의 성공을 이끌었던 visicalc라는 사무용 스프레드시트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들어가기 전에 스프레드시트가 어떻게 태동하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979년 댄 브리클린, 밥 프랭크스턴에 의해 시작 된 스프레드 시트
Spreadsheet의 학문적 아이디어는 이미 1961년에 Richard Mattessich 교수에 의해 정립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AT&T 등 몇몇 대형 회사에서는 대형 메인 프레임 컴퓨터 용으로 LANPAR( LANguage for Programming Arrays at Random )라는 초창기 spreadsheet를 활용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개념은 어느정도 이론적으로 정립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내용으론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에 재학중이던 댄 브리클린이 수업중 강의과정에서 스프레드쉐트를 탄생 시켰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개념적인 이론은 이미 구체화 되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Visicalc를 개발한 브리클린이 메인 프레임에 활용 되던 이 이 소프트웨어를 직접 봤는지의 여부는 확인 할 수 없지만 원론적으로 그를 스프레드쉬트의 아버지로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블리클린은 경영대학원에서 케이스 스터디 수업(성공한 기업의 사례를 분석하고 토론하는 형식의 수업으로 현재 MBA 과정의 필수 요소중 하나입니다.)을 듣고 있던 중 재무 모델을 강의하던 교수가 parameter(인수)하나가 바뀌자 칠판 가득 써놨던 공식을 일일이 다시 계산하는 광경을 보고 수식이 들어있는 전자 계산표(spreadsheet)가 있다면 숫자 하나를 바꿔서 모든 재계산을 자동적으로 할 수 있으리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 것이 스프레드쉬트의 역사적 첫발로 기억됩니다.

실제 프로토 타입은 1978년 가을에 만든것으로 알려져 있고, 초기 버전은 5개의열과 20개의 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쯤해서 MIT에서 수학하던 친구 밥 프랭크스턴을 이 프로젝트에 참여시키는데 고용했다는 설도 있고 취미로 개발했다는 설이 있지만 댄 브리클린이 먼저 시작후 밥 프랭크스턴이 참여하는쪽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댄 브리클린이 쉽게 이 스프레드 쉬트 개념을 생각 했었던 이유는?
우선 기본적으로 머리가 뛰어났던 이유도 있지만, 전설에 의하면 브릭클린의 아버지는 인쇄 업자였는데 아버지의 영향으로 70년대 중반 초창기의 컴퓨터 조판 장비 판매와 관련된 일을 했었다고 합니다.

구조가 치밀하게 짜인 조판 작업을 보고 행과 열로 배열된 '셀(cell)' 개념을 생각해 냈다고 하는데 브리클린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기 위한 설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MIT의 밥 프랭크스턴이 합류하자 프로그램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1978년 가을에는 대니얼 필스트라가 이 VisiCalc 프로젝트에 동참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사업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MIT와 하버드대학교 경영 대학원을 졸업했고 Personal Software 를 운영중인 사람이었고 상당히 마케팅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대니얼 필라스트를 만나게 된 것은 댄 브리클린과 밥 프랭크스턴이 스프레드쉬트 개발을 위해 컴퓨터를 찾게 되는데 워낙 컴퓨터가 귀한 시절이라 쉽게 구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수소문문 끝에 컴퓨터를 빌려준 사람이 바로 대니얼 필라스트 였는데, 그 역시도 애플2가 워낙 고가라 쉽게 구매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케팅적이고 지극히 계산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던 그는 애플의 스티브잡스를 찾아가 애플2용 체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줄테니 애플2를 저렴하게 구매 할 수 있게 해달라는 협상을 진행합니다.

한마디로 애플2를 위해서 소프트웨어 헌신 할 마음은 있으나 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접근한 것 같습니다. 애플과 스티브잡스 입장에서 손해 볼 일이 아니었기에 순순히 허락한 것입니다.

결국 애플2는 댄 브리클린과 연결되는 하나의 메신저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이들이 스프레드쉬트를 기반으로 회사를 설립하는데 큰 계기가 되지요.

결국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79년 1월 2일, 브리클린과 프랭크스턴은 Software Arts Corp를 설립하고 필라스트도 자신이 설립한 Personal Software사를 잘 운영하다 이후 VisiCorp로 개명하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회사 설립후 브리클린과 프랭크스턴은 본격적인 마케팅을 진행하는데 그 첫번째 일환으로 Byte Magazine이라는 잡지에 VisiCalc의 티저 광고를 시작합니다. VisiCalc라는 이름은 "visible calculator"의 약식 표현법으로 이때 공식화 된 것 같습니다.


의외의 능력자 대니얼 필라스트와의 인연과 Visicalc의 운명
돈도 없고 아직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브리클린과 프랭크스턴이 Byte magazine에 광고를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필라스트의 도움때문입니다. 대니얼 필라스트는 Byte magazine의 창업자이며 편집자였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다들 알겠지만, Visicalc의 성공을 위협하는 요소가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필라스트의 Visicop이기 때문입니다.

암튼 좀더 필라스트에 대해 살펴보면 그는 능력자 였던게 분명합니다. IT 매거진 편집장 소프트웨어 회사 창업자로 있었고 애플 스티브 잡스와도 어느정도 알고 지내는 마당발이었기 때문입니다.



필라스트는 이 이외에도 IT 역사에 길이 남을 기업중 하나인 Frontline Sytem, Inc사의 경영자이기도 했습니다. 이 회사는 스프레드쉬트를 한차원 높은 기술에 도달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회사로 해찾기(Solver)의 모듈(add-in)을 개발하여 Excel, Lotus 1-2-3에 공급했던 회사입니다.

해찾기는 spreadsheet modelling에서 취급하는 선형 계획법 문제를 푸는데 없어서는 안될 도구로서 Frontline system에서는 Excel에서 처리하기 힘들 정도의 복잡한 선형 계획 문제를 풀 수 있는 Premium solver를 판매하던 회사이기도 합니다.

Visicalc는 비록 회사를 설립한지 3년만에 Lotus사에 흡수되어 1-2-3의 모태가 되었고, Dos 시절을 호령했던 Lotus사의 1-2-3는 이제는 역사속에 기록 된 전설로 남게 되었지만 IT 역사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은 확실 했던 것 같습니다.


Visicalc 앞세운 Software art의 도약의 계기
창업후 그들이 본격적으로 괘도에 오르게 된 것은 애플의 애플2에 탑제되면서 부터입니다. 애플과 별다른 왕래가 없었던 이들이 애플과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대니얼 필라스트의 도움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중간에서 애플용 사무용오피스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이들을 소개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어쨌든 애플과 계약이 진행 된뒤 제품 출하를 위해 개발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시기가 1978년초입니다.

출하용 제품에서는특별한 버전의 어셈블리가 선택합니다. EDS에서 나온 스펜서 러브(Spencer Love)가 개발한 이 어셈블리 언어는 프로그램의 이전 부분을 호출하는 매크로에 있어서 애플이 사용하는 어셈블리 언어와 달랐는데도 그들이 이를 선택한 것은 애플2에서는 소프트웨어 개발이 실제로는 어려운 플랫폼이라 생각했고 좀 더 유연한 환경에서 개발해야 앞으로 이 소프트웨어를 활용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 했던듯 합니다.

결국, 이 소프트웨어를 이용하기 위해 어셈블리가 돌아가는 운영체제인 멀틱스(Multics)가 탑재된 미니컴퓨터 구매하게됩니다. 작은 회사로서는 정말 쉽지 않은 결정 이었지만 미래르 위한 투자로 생각하고 구매한 것인데 이로 인해 Software Arts를 브리클린의 아파트가 있는 빌딩의 다락방으로 이주해 손해를 최소화하게 됩니다.




브리클린과 프랭크스턴이 이 스프레드쉬트 시스템으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게 되는데는 그들의 남다른 소프트웨어 개발 방법론도 한목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만 쓸 프로그램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려는 의도를 갖었던 것입니다.

제품의 연구와 디자인시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사용자들이 원 할 기능과 입장에서 설계하려는 접근법을 선보입니다. 가령 Basic 데모에 있었던 레이블링을 예로 들면 셀을 그저 B2라고 명명하기보다 전체 열이나 행에 레이블을 붙여서 같은 셀로 만들고 이 셀 이름을 JUNESALES같은 식으로 붙일 수 있게 한 것인데 다른 셀 주소를 사용할 때 실수를 많이 하기 때문에 이런 실수를 최소화 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실제 사용 화면 확장에도 유리했고 현대 스프레드 시스템의 큰 틀이 이때 생긴 것입니다. 윈도우 엑셀 프로그램등을 보면 과거 이들이 만든 스프레드쉬트의 근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애플 뿐만이 아니라 윈도우에서도 사용 할 수 있게 이 제품을 확장해 범용성을 갖추려고 했고 인터페이스 설계에서도 혁신적인 구조를 제시하는데 사용자가 스프레드쉬트에서 각기 다른 두 부분을 함께 작업하고 싶어한다면, 그저 화면을 나누어서 각 부분을 동시에 작동시킬 수 있도록해 편리성을 강조하게 됩니다.


애플2의 성공은 결국 이 사무용 Visicalc 때문이었다
애플 II는 사업용 소프트웨어 개발에 어려운 플랫폼이었으며, 프랑스턴은 애플 II에서 쓰기 위해 몇 가지 해킹을 해야 했습니다. 키보드 또한 텍스트 입력에 사용하기가 어려웠는데 사용자가 너무 빨리 타이핑을 친다면 문자들이 잘 안 쳐지는 문제를 앉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단점을 피하기 위해, 비지칼크는 키보드를 계속 모니터링 하는 기능을 제공합니다. 이 방식은 별도의 자원을 할당해야해 시스템에 부하를 줄 수 있었지만 사용자를 위해 이런 결정을 하죠.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애플의 파일 시스템은 라이센스를 통해서만이 이용 가능했는데 비싼 값은 아니었지만 부담이 되었던 이들은 소프트웨어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통하여 다른 애플 프로그램들과 호환성을 갖는 '클린'(애플의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았다) 파일 시스템을 구현시켜 이런 부담을 최소화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1979년 11월부터 판매에 들어갔는데 가격이 당시 100달러라는 큰돈을 지불해야 했지만 대박을 치게 됩니다. 이 소프트웨어가 너무나 잘 팔려서 애플2에 비지칼크를 번들시켜서 판매하는 가게들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비지칼크의 성공은 결국 애플 2 성공을 의미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애플2 성공이 visicalc 때무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1981년, Software Arts는 비지칼크로부터만 1200만 달러의 로열티 수입을 거두며 명실 공히 당시 최고의 소프트웨어사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댄 브리클린은 이를 계기로 유명 인사가 되는데 컴퓨터 업계의 개척자로 추앙받던 아담 오즈본(Adam Osborne)에게서 White Elephant 상을 수상받기도 했습니다.문제는 그 후에 일어나는데 1983년 로터스 1-2-3이 나오자 비지칼크를 로터스가 추월하기 시작하였고 1983년에는 Personal Software가 Software Arts를 제소하는 일까지 일어납니다.

이일이 있은뒤 비지 칼크는 비지칼크 판매를 중단합니다. 그리고 personal software에 인수하며 역사속에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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